고려 우왕 창왕 공양왕 vs 이성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시기는 고려의 마지막 세 왕들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왕 창왕 공양왕 고려 마지막 3대 왕들의 최후와 이성계 세력의 성장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알아봅니다.
우왕의 폐위 (1388년)
1388년(우왕 14년),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는 요동 정벌을 결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의 강력한 주장으로 정벌이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5월 22일,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독단으로 회군을 결정했습니다.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 군은 개경에 진입해 최영을 체포하고, 6월 8일 우왕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추방했습니다. 이로써 이성계 일파는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창왕의 즉위와 폐위 (1388-1389년)
우왕이 폐위된 후, 1388년에 9세의 나이로 창왕이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창왕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389년 11월, 김저가 이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모의가 발각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와 심덕부 등은 창왕을 폐위시켰습니다.
공양왕의 즉위 (1389년)
창왕이 폐위된 직후인 1389년 11월, 이성계 세력은 신종의 7대손인 왕요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이가 바로 공양왕입니다. 공양왕의 즉위는 이성계가 자신의 즉위를 위한 사전 작업의 일환이었습니다.
우왕과 창왕의 처형 (1389년)
공양왕 즉위 후인 1389년 12월, 간관들이 우왕과 창왕의 사형을 청했습니다. 결국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참수되었습니다.
공양왕 재위 기간의 주요 사건 (1389-1392년)
공양왕 재위 동안 이성계 세력은 점진적으로 권력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 1390년 1월: 이성계가 8도의 군마를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 1390년 5월: 윤이·이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의 반대 세력이 대거 제거되었습니다.
- 1391년 1월: 이성계가 삼군도총제사로 임명되었습니다.
- 1391년 5월: 과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 1392년 3월: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1392년 4월: 정몽주가 살해되었습니다.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건국 (1392년)
1392년 7월, 이방원 등이 왕대비의 교서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위하고 원주로 추방했습니다. 이후 공양왕은 강원도 간성군으로 추방되어 공양군으로 강등되었습니다.
공양왕이 폐위된 후, 이성계는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고, 고려는 34왕 475년 만에 멸망했습니다.
공양왕의 최후 (1394년)
공양왕은 1394년 3월 14일에 강원도 삼척 궁촌리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4월 17일 궁촌리 마을 입구 고갯길에 있는 고돌산의 살해재에서 왕세자 왕석과 함께 시해되었습니다.
사건의 흐름과 의미
이 일련의 사건들은 고려 말 권력 구조의 변화와 새로운 왕조의 탄생 과정을 보여줍니다.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후, 단계적으로 권력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우왕과 창왕의 폐위는 구 세력의 제거를, 공양왕의 옹립은 새로운 정치 질서로의 전환을 의미했습니다.
이성계는 처음에는 직접 즉위하지 않고 공양왕을 옹립했는데, 이는 자신의 즉위에 대한 지지 기반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공양왕 재위 기간 동안 이성계 세력은 군사권을 장악하고 과전법을 제정하는 등 실질적인 권력을 확보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공양왕의 즉위는 이색, 변안열 등 이성계에 반대하는 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이성계 세력은 윤이·이초 사건 등을 통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최종적으로는 정몽주 살해를 통해 고려 왕조 지지 세력을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결국 이 과정은 고려 왕조의 종말과 조선 건국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왕조 교체를 넘어, 새로운 정치·경제·사회 체제의 수립을 의미했습니다. 과전법 제정, 성리학적 정치 이념의 도입 등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과 권력 투쟁,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요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